은행 과징금 논란, 책임은?

가계빚을 줄이고 공정위 과징금을 받은 은행


금융당국의 방침을 충실히 따른 결과가 오히려 과징금으로 되돌아온다면, 과연 어느 기업이 정부 지침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까요? 최근 국내 주요 은행들이 금융위원회의 가계대출 관리 방침에 따라 대출 총량을 억제했지만,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 공동행위'로 판단하여 수십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은행들은 "정부 지시 이행에 따른 불이익"이라며 반발하고 있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정책 신뢰성, 행정 일관성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 사태의 배경과 문제점, 그리고 제도 개선 방향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금융위의 가계부채 관리 지침, 은행은 따랐을 뿐

금융위원회는 2020년 이후 꾸준히 가계부채 관리 강화 기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저금리 기조와 유동성 확대 속에 가계대출이 급증하며 부동산 가격 상승, 가계 채무 부담 증가, 금융 불균형 위험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에 금융위는 은행권에 대출 총량 관리를 요청했고, 특히 가계신용대출 증가율을 연 5~6% 이내로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신용대출 한도 축소, 고신용자 대출 중단, 대출금리 인상 등의 조치를 취했고, 고객 불만이 높아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책 이행에 충실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부와의 협력 차원에서 이러한 조치가 정책적 필요에 따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언론에서도 "은행권이 금융당국 요청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러한 행위를 은행 간 '담합', 즉 시장 경쟁을 저해하는 부당 공동행위로 간주하고, 국내 16개 은행에 총 100억 원에 가까운 과징금을 부과한 것입니다. 은행들은 한 목소리로 “금융당국 지침에 따랐을 뿐인데, 왜 법 위반이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공정위의 판단 기준: 자율인가, 담합인가?

공정위는 은행들의 대출 제한 조치를 단순히 정책 이행이 아니라, 은행들끼리의 정보 공유와 유사한 방식의 행위가 반복된 점을 근거로 ‘암묵적 담합’으로 판단했습니다. 특히 대출금리, 한도, 상품 판매 중단 등의 시점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경쟁 제한적 요소가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은행권은 “금융위의 직접적 요청 또는 간접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며, 이를 담합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책과 행정의 충돌이라고 반박합니다. 게다가 당시 은행들은 개별적으로 대응한 것이며, 협의체나 사적 모임 등에서 논의하거나 공동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공정위의 입장은 법적 기준에 따라 “기업 간 경쟁 제한은 외부 지침과 무관하게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판단은 정부 부처 간의 정책 혼선, 그리고 기업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라는 비판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금융감독원이나 금융위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는 구체적인 실행 방식에 대한 협조 요청이 있었으며, 은행들은 이를 충실히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정책 일관성과 기업 신뢰 회복을 위한 방향

이번 사태는 단순히 과징금 문제를 넘어서 국가 행정 신뢰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규제 당국의 지침을 따르면서도 타 부처의 법 집행으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정책 이행 동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유사한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부 부처 간 정책 조율 체계가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합니다. 특히 금융정책과 경쟁정책의 충돌 가능성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사전 협의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기업에 명확한 행동 기준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또한, 기업이 정책적 요청에 따라 조치한 사항이라면, 해당 사안에 대해선 법적 면책 또는 행정지도를 우선시하는 방식이 바람직합니다. 정책 집행에 대한 보상은 없더라도, 적어도 처벌을 받지 않는 ‘행정 보호의 원칙’이 확립돼야 기업은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할 수 있습니다.

결론: 누구의 책임인가? 이제는 구조를 바꿔야 할 때

이번 은행 과징금 사태는 단순한 법 위반 논란이 아닌, 정부 정책 신뢰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금융위는 가계부채를 억제하기 위해 은행권에 대출을 줄이라고 했고, 은행들은 이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공정위는 그 조치가 경쟁을 제한했다며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기업의 합리적 예측 가능성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행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 부처가 각기 다른 법령과 목표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런 다원적인 구조 속에서도 국민과 기업에게는 하나의 '국가'로 인식되며, 그 정책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한 부처가 요청한 행위를 다른 부처가 처벌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기업은 정책 이행을 주저하게 되고, 정책 실효성은 떨어지며, 그로 인한 부담은 소비자가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책 집행에는 명확한 기준과 책임 구조가 필요합니다.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행정 조직이라면, 부처 간 협의 부족으로 발생한 혼선에 대해 기업에만 책임을 묻는 방식은 지양돼야 합니다. 이번 사례를 통해 정부는 반드시 교훈을 얻어야 하며, 다음과 같은 구조적 개편이 필요합니다:

  • 행정 통합 가이드라인 마련: 정책 충돌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대해 사전 협의와 조율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갖춘 중앙 통합 지침이 필요합니다.
  • 행정 면책제 도입 검토: 정부 정책 요청에 따라 기업이 행동했을 경우, 경쟁법이나 기타 법령 적용에서 일정 부분 면책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 투명한 기록 및 해석 가능성 확보: 비공식적 가이드라인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정부의 모든 정책 요청은 공식화되고 공개되어야 합니다.
  • 부처 간 공동 책임 구조 확립: 단일 정책으로 기업이 영향을 받았을 경우, 부처 간 합의 하에 공동으로 설명 책임을 지는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기업은 정부를 신뢰하고 정책을 따릅니다. 그 신뢰가 배신당하는 순간, 국가 정책은 한낱 문서에 불과한 명령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국민이 감당하게 됩니다. 정책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신뢰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이제는 행정 구조와 정책 집행 시스템 자체를 점검하고, 기업과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행정 체계를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억울한 은행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정부는 스스로의 신뢰를 지켜야 합니다.